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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 7의 봉인(The Seventh Seal, 1957)

제 7의 봉인은 1957년 잉마르 베리만이 감독한 1957년 스웨덴 영화다. 일곱번째 봉인은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구절로 일곱번째 봉인이 풀리면, 최후의 심판이 시작된다. 영화는 14세기 십자군 원정을 마치고 10년만에 고국 스웨덴으로 돌아온 기사(안토니우스 블로크)와 종자(옌스)가 해변에 쓰러져 있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아직 기사와 종자는 모르지만, 배를 통해 전파된 흑사병이 해안 지역을 휩쓸었고, 점점 내륙으로 퍼지고 있는 상태였다.

영화에서는 여러 종류의 흑사병 중에서 림프절을 감염시키는 흑사병이었다는 이론을 따르고 있다. 자막에는 서혜부라고 하는 서혜부는 다리 쪽에 있는 림프절이라고 한다. 하지만 영화에 나오는 그림에서 부종과 목을 쥐어뜯고 있다는 묘사가 있어서 림프절 흑사병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또 마을에서는 Flagellant라고 불리는 채찍 고행을 하는 행렬까지 보여준다. 이들은 집단을 이루어 마을 사이를 방랑하며 스스로를 채찍으로 때리는 고행을 하고 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피를 흘리며 마을 사이를 돌아다녔기 때문에 흑사병이 더 빨리 퍼졌다는 추측이 있다. 그리고 무고한 희생자를 흑사병의 원인인 마녀로 몰아 화형하는 마녀 사냥도 하게 된다. 

해변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린 기사에게 죽음이 찾아온다. 죽음의 비주얼은 지금봐도 엄청난데, 흑백영화라 그런지 더 선명하고 강렬하다. 죽음은 검은 옷을 입고 가면을 쓴 것 같은 하연 얼굴을 하고 있다. 센과 치이로의 행방불면에 나오는 가오나시 같은 느낌이지만, 카리스마가 넘친다.

해변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볼 때, 블로크와 옌스가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겪은 일도 순탄치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음을 본 기사는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체스 게임으로 죽음을 도발하고, 죽음은 체스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을 유예해주기로 한다.

영화는 매우 강렬한 이미지와 대사를 보여주고, 묵직한 대사 속에서는 삶과 죽음, 냉엄한 세계와 구원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된 것은 미하엘 하우스켈러의 '왜 살아야 하는가'를 다 읽은 기념이었다. 책의 원재는 삶과 죽음의 의미 쯤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 영화와 책의 내용이 어느 정도 공감대를 이루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 블로크의 이야기

기사 블로크는 이상주의자로 삶과 죽음, 신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어한다. 그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으로 10년전, 디아빌리스 셀레스티스 병원의 의사 역할을 하고 있던 성직자 미라빌리스의 설득으로 십자군에 참가한다. 블로크에게는 약혼녀가 있었지만, 그는 신의 명령에 따라 십자군에 참전하고, 전쟁 과정에서 신앙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첫 번째로 들르는 마을의 교회에서 블로크는 사제에게 고해한다. 기사는 혐오감과 두려움에 빠져 있었고, 그로인해 신앙심이 약해져 공허해진 마음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기사는 죽기 전에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그가 원하는 진실은 신과 관련되어 있었다. 신은 인간의 지각으로 느낄 수 없다.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믿고 싶지만, 믿을 수 없다. 믿을 수 없어서 신을 지우려고 했지만, 그럼에도 신의 존재는 마음 속에 있었다.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데, 있는 것에 대한 믿음은 올바르지 않다. 그래서 손에 잡힐 듯 한 증거를 원한다.

사제는 냉담하게 신은 침묵하고, 아무 것도 없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그걸 고민하지도 않는다고 반문한다. 하지만 기사는 죽음 후에 아무 것도 없다면, 인생은 공포이고, 사람들은 공포를 우상화하고 신이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자신은 죽음이 유예된 동안 공허와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찾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죽음이 자신을 찾아왔으며, 자신은 비숍과 기사로 체스에서 죽음을 이길 것이라고 말한다. 그 때 죽음이 자신의 얼굴을 드러낸다. 기사는 분노하지만,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 성직자의 지혜도 기사의 힘도 죽음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

블로크는 마을 밖에서 광대 가족을 만난다. 그리고 천대 받는 광대 가족이 이룬 행복을 보며 10년 전 헤어진 약혼녀를 생각한다. 그리고 두 번째 체스의 수를 둔다. 블로크는 죽음을 함정에 빠뜨리고 체크 메이트를 해서 죽음이 기사 기물을 가져가는 것을 막는다. 하지만 죽음은 기사와 광대 가족이 숲길로 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깊은 숲 속에서 마녀로 몰린 소녀가 화형 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성직자에게 자신이 찾는 의미와 진실에 대해 물었던 블로크는 이번엔 악마에게 물어볼 생각으로 소녀에게 다가간다. 악마라면 신에 대해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소녀는 진짜 마녀가 아니었고, 그저 마녀로 몰려 두려움에 떠는 인간이었다. 

블로크는 그녀가 죽기전에 구원을 위해 가슴에 성호를 그을 수 있게 하려고 하지만, 그녀의 손목은 부러져 있는 상태였다. 호송하는 병사를 죽여 소녀를 구할 생각도 해보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의식을 몽롱하게 하는 허브를 먹여 고통을 줄여주려고 한다.

깊은 숲 속에서 마지막 체스 게임이 진행된다. 죽음은 순조롭게 기사를 몰아붙인다. 하지만 기사는 일부러 판을 엎어서 광대 가족이 몰래 도망갈 수 있도록 시간을 끈다. 블로크가 체스에 지자, 죽음이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기사가 비밀을 알려달라고 하지만, 죽음은 자신에게 비밀이 없어서 알려줄 수 없다고 한다. 기사는 죽음이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종자 옌스의 이야기

종자 옌스는 자신의 주인과 달리 현실적인 성격이다. 그는 세상에 대해서 크게 고민하지 않고, 죽음을 외면한다. 그에게 신앙심도 없지만, 그렇다고 신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천국도 마다하고, 지옥은 모른 척 한다. 하지만 그는 첫 번째 들르기 전에 흑사병에 죽은 시체를 발견하지만, 기사에겐 말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흑사병으로 텅빈 마을에서 죽은 여자의 팔찌를 훔치고 있는 타락한 성직자 만난다. 그 성직자의 설득 때문에 주인을 따라 10년간 고통스러운 성전에 참여한 옌스는 다시 만나면 그를 죽이겠다고 한다. 그리고 텅 빈 마을의 생존자인 소녀를 데리고 다음 마을로 향한다.

두 번째 마을에서 옌스는 성당에서 '죽음의 무도'를 그리는 화가를 만나서 자신의 인생관을 말한다. 그리고 여관으로 가는데, 이번엔 타락한 성직자가 불쌍한 광대를 몰아세워 괴롭히고 있었다. 옌스는 훔친 팔찌를 팔려고 하는 그를 붙잡아 혼내주고, 그 틈을 타, 광대는 가족에게로 도망친다.

다시 기사와 만난 옌스는 숲길로 가게 되는데, 그 숲에서 다시 타락한 성직자를 만난다. 이번에 그는 흑사병에 걸려 있었다. 옌스는 마을에서 만난 화가에게 흑사병에 걸리면, 낙타처럼 갈증에 시달린다는 이야기를 기억해내고, 물 한 모금을 구걸하며, 자비를 원하는 타락한 성직자가 고통 속에 죽어가도록 놔둔다.

그리고 광대 가족이 떠난 옌스와 나머지 일행은 밀려오는 폭풍우를 피해서 버려진 고성으로 향한다.

최후의 심판

버려진 성에는 한 여자만 남아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흑사병을 피해서 모두 피신한 상태였다. 놀랍게도 그 여자는 블로크의 약혼녀로 무려 10년동안 블로크를 기다리고 있었다. 폭풍우 속에서 6명의 일행은 약혼녀가 읽어주는 요한계시록을 듣는다. 그리고 누군가 찾아온다. 옌스는 아무도 온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찾아온 사람은 죽음이었다.

체스 게임에서 이긴 죽음은 기사와 기사와 함께 있는 이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했고, 이제 죽을 시간인 것이다. 자리에 모인 6명은 각자 다른 반응을 보인다.

블로크는 체스 게임의 과정에서 신앙심을 회복하고, 신에게 구원을 바란다. 옌스는 주인에게 모두 함께 있으니 냉철해지라고 하면서, 살아있는 마지막을 즐기라고 한다. 옌스가 구한 소녀는 죽음을 숭배하고, 약혼녀는 그저 죽음을 받아들인다. 대장장이는 변명을 하고, 남을 속이고 방탕하게 살던 대장장이의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리고 폭풍우가 끝나고 아침이 온다.

예술가와 가족, 광대

광대 가족은 아기인 미카엘(천사의 이름이 붙어있다.)과 부모의 이야기가 있고,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옌스가 마을에서 만난 화가는 죽음의 무도를 그리고 있는데, 이 그림은 흑사병이 창궐한 중세 시대에 해골의 형상을 한 죽음이 사람들과 춤을 추는 주제로 그려진 그림이다. 이 그림의 모습은 폭풍우가 끝난 후, 광대는 기사와 종자 일행이 죽음의 손을 잡고 춤추며 사라지는 환영을 본다.

죽음을 보는 것도 신을 보는 것도 예술가다. 진정한 예술가는 존중받지 못하지만, 그들은 '제 7의 봉인' 영화를 만든 것처럼 신도 보고, 악마도 본다. 그리고 그걸 우리에게도 보여준다. 예술가가 보여주는 그림은 진짜는 아니지만, 진짜를 보여주기도 하고, 보여주지 않기도 한다.

영화의 이야기 속에서 기사는 고결한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의 삶의 의미를 다른 사람을 구하는 것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이 누군가를 구해주는 마음 속에서 의미와 진실, 신을 찾고 신앙을 회복한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우리는 예술을 수행하는 광대 가족의 행위를 통해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찾게 된다.

하지만 광대 남편처럼, 그 환영을 보고 느낄 뿐,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설명해줄 수는 없다. 이 의미는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종자가 아닌 기사처럼 우리 주변의 죽음을 직시할 수 있다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흑백, 고전의 강렬함

워낙 비주얼이 압도적이다 보니, 유명한 영화로 왠만한 사람은 이름은 몰라도, 그림만 보면 대강 아는 작품이다. 놀라운 점은 영화가 단순히 신앙과 종교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다양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명을 또 따로 쓴건지, 흑백의 대비는 빛과 어둠으로 화면을 영상이 아닌 그림처럼 보이게 한다.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묵직한 외국어 대사는 신비한 느낌을 준다. 시간이 흘러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했고, 전 세계적으로 약 600만명이 죽었다. 역병과 전쟁의 시대에서 꿈과 상상으로 둘러싸인 환영의 세계가 아닌 진짜 세계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